2010 도쿄 1 2

지난 7월 3일부터 9일까지 도쿄에 다녀왔다. 그 중 5일부터 9일까지는 여름 휴가를 썼다. 이 휴가를 기록하기 위해 오랜만에 이글루스에 찾아왔다.

밤섬해적단 도쿄 투어 이야기는 4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는 3월 말로 기억하지만, 어쨌든 3말4초쯤이었다. 토요일 홍대 수카라에 있다가 두리반으로부터 급히 연락이 왔다. 마쓰모토 하지메가 두리반을 찾았는데 통역해 줄 사람이 없다고 전화가 온 것. 거기서 그는 마침 밤섬해적단 공연을 봤고, 한국사람들도 알아먹기 힘들다는 그 가사 및 음악 세계를 단박에 이해했다. 이유는 뭐, 그놈이 그놈이니까. 상황을 정확히 이해한 내가 "일본에 가면 가게(리사이클점 '아마추어의 반란')에서 재워줄 수 있냐"고 협박하자 "몇 박이든 자라, 아니, 공연을 하는 건 어때?"라고 응수해왔고 일본 라이브는 그렇게 헐겁게 성사됐다. 

 (출처: 인디안밥)

마쓰모토 하지메는 일본의 빈곤운동가이자 리사이클 가게 '아마추어의 반란' 5호 점장으로 <가난뱅이의 역습>이라는 책을 써서 자발적 가난(?)을 지향하는 이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지난해 5월경 아마미야 카린 등과 함께 묶어서 기사에서도 종종 등장했다.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501135938&Section=03




             마쓰모토 하지메

(한국판에는 사라졌지만 이 책의 부제는 '공짜로 사는 방법'(ただで生きる方法)이다. 실제로 담겨 있으니 일독을 권한다.)



당시 그는 <한겨레 21>의 인터뷰 특강(http://h21.hani.co.kr/arti/reader/together/26761.html) 강사로 초청을 받아 방한 중이었는데, 어찌어찌하다가 두리반에 흘러들었던 모양이다. 이때 신촌 일대에 다음과 같은 삐라로 선동질을 하기도 했다.

아무튼 그는 이렇게 게릴라식 모임이나 데모를 주최하는 데에 도가 튼 사람이라 음악을 직접 하지는 않는다고 해도 각종 인맥을 동원해 라이브를 일사천리로 진행시켜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러했다. 다만 메일이나 트위터 멘션으로 연락만 하던 상황에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가 없는데다가 이 쪽이 초짜라, 비행기표 취소만 4번을 했던 것 같다. (그 중 한두번은 밤섬 보컬이 자기 영문명을 잘못 말해줘서였음을 밝힌다)

아무튼 애로사항은 다소 있었지만 어찌어찌 날짜는 7월 3일부터 9일까지로, 그리고 공연은 4일, 6일 2회로 최종 조율됐다. 나는 밤섬 1집의 노래 가사를 전부 일어로 번역해서 가져갔는데, 그건 두리반에서 하지메한테 일일이 곡명을 설명하는 데에 큰 어려움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찌라시를 던져주면 알아서 보든 말든 듣든 웃든 할 것 같았고, 그 예상과 수고는 정확히 적중했다.


7월 3일: 코엔지 입성

나중에 이어서 쓰겠다. 사진이 많아서 정리하기 귀찮아.


2002년 한겨레 사설 0


시게노부 후사코 관련 기사 1

한겨레21 773호

"60대 혁명 여전사의 포기할 수 없는 희망" (손발이 오그라드는 헤드... ;ㅁ;)
http://h21.hani.co.kr/arti/world/world_general/25553.html


"테러의 여왕?시대가 그렇게 만든 것"
http://h21.hani.co.kr/arti/world/world_general/25551.html


디오니소스적 기자와 아폴론적 기자 3



서평을 쓰기 위해 <파리는 사랑한다, 행복할 자유를!>이라는 책을 받았다. 이보경 MBC 기자가 1년 반 남짓 파리에 체류하며 기록한 프랑스 견문록이다. "한심한 견문록, 쓰레기 사담집이 판치는 시장에서 이보경의 시선은 가볍지 않다"고 한 추천사는 말하고 있는데, 감각적인 표지와 기나긴 제목만 보고 이게 바로 '한심한 견문록, 쓰레기 사담집'이 아닐까 우려하기도 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 자세한 이야기는 매체에 올릴 서평을 위해 아껴두겠지만,  '하던 일 멈추고' 잠깐 생각해 볼 대목이 생각보다 많다. (-원래 '하던 일 멈추고' 폴더에 썼다가 길어져서 '책'코너로 이동시킴)

첫째로 저들도 누군가에게 피 묻힌 역사가 풍성하고 현재도 차별과 배제의 맨얼굴을 숨기지 못하는 주제에 '젠 체'하는 것에 대한 '아줌마적 빈정거림'이 빛난다. 노예제로 마련한 선진국의 토대나 나치에 자발적으로 부역한 비시 정권, 알제리 독립전쟁같은 과거 때문만은 아니다. 저자는 명문 초등학교 교문 앞에서는 교문 나서는 학생들 중 '아시아인, 흑인'이 없음에 신경을 쓰고, 환경미화원 가운데 흑인이 열에 일곱임을 알아차린다. 프랑스 사회가 가진 '매끄러운 겉'과는 다른 '거친 속'이 드러나는 일은 저자의 경험 속에서도 수두룩하다. 복잡한 서류와 관례화된 절차로 외국인에 대해 보이지 않는 차별의 벽을 치는 공무원들은 "이게 힘들면 프랑스에 사는 거 그만두든가" 식의 태도로 저자의 힘을 뺀다.

예전에 부산에서 본 <히든>이 떠오른다. 미카엘 하네케의 이 영화는 프랑스 지식인 사회의 위선을 차별의 객체가 아닌 '투명한 시선'으로 고발해 낸 문제작이다. 영화는 주인공 조르쥬의 집에 녹화 테이프 하나가 배달되는 것으로 시작된다. 조르쥬는 TV 독서 프로그램을 진행하거나 대담에 참여하는 일을 업으로 삼는 사람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집에 들어찬 방대한 분량의 서적으로 보나 입고 다니는 것으로 보나 '중산층 이상 지식인'을 표상하는 인물이었다. 조르쥬가 받은 테이프에는 자신의 집 앞 풍광이 '하염없이' 녹화되어 있다. 영상은 그 뿐이다. 아무것도 지시하거나 말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조르쥬는 어마어마한 공포를 겪는다. 비디오는 몇차례 더 배달되는데, 그 때마다 카메라는 점점 더 조르쥬의 사생활에 근접해 온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난(아니 공포에 시달리던?) 조르쥬는 어린 시절 자신의 집으로 입양될 뻔 했던 이를 찾아간다. 어린 시절 조르쥬는 자신의 집으로 입양된 식민지 출신 아이에게 누명을 씌워 그를 쫓아낸 적이 있다. 조르쥬는 이 테이프를 찍고 보낸 것이 그의 행동이라 여기고 찾아가 윽박지르지만 공포와 죄책감, 히스테리와 자기합리화의 골은 더욱 깊어진다. 한편 억울함을 호소하던 그 알제리 출신 목수(?)는 엄청난 방법으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데.... 그 장면을 목격한 조르쥬가 돌아오는 길에 펍에 들러 맥주를 마시고, 집에 와 깊은 잠에 든 다음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다는 게 영화의 결말이다. 끔찍한 기분이 들게 만드는 영화였다.

이 책은 <히든>을 봤을 때처럼 사람을 끔찍하게 만들진 않는다. 읽으면서 실실, 하하, 호호 정도는 웃을 수 있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줄글의 집합이다. 그러나 '대단하진 않아도 우아한' 척 하는, 프랑스 사회의 중앙~중상을 향한 제 3자의 시선이라는 점에서 <히든>의 시선을 떠올리게 하는 부분이 다소 있었다. 무언가를 고발한다거나 비판한다거나 하는 거창한 의도는 없지만, 사랑이니 자유니 혁명정신이니 하는 과다 소비되고 있는 프랑스의 좋은 이미지에 대한 눈초리는 충분히 삐딱하다. (이것이 주로 젊은 여성들이 쓰는 '프랑스 예찬 사담집'에 비해 '아줌마적'이라 할 수 있달까?) 어쨌든 <히든>의 온도와는 전혀 다르지만, 프랑스라는 나라에 '관객'으로 서 있는 사람의 중얼거림에서 오는 효과는 <히든>의 힘만큼 강렬하다. 

둘째로 이것은 아마도 저자의 직업이 기자, 그것도 MBC의 기자라는 데에서 오는 관전 포인트겠지만, 글 구석구석에서 저자의 기자관/언론관이 드러난다. 사실 비율상 언론에 대한 챕터는 많지 않다. 그러나 행간에서 '기자로서의 정체성'을 감출 수 없다고나 할까."대한민국 보통 아줌마 이보경 기자가 들여다본 프랑스의 속살", 부제를 뜯어보면 '대한민국 보통 아줌마'가 중요해 보이지만 그건 결국 이보경 '기자'를 수식하는 말 아닌가.2007-8년 프랑스에서 겪은 일들이 소재이지만, 출간된 시점이 지금이라는 것도 그렇게 읽도록 만드는 컨텍스트다.  2009년 8월 말 '미디어 오늘'에 기고한 저자의 글이 통째로 실리기도 한다.

"MBC는 방송 공영성을 위해 멋지게 싸워야 한다. 국민 응원단은 장렬한 이 한판을 볼 권리가 있다. 그렇지 않은가. MBC가 그동안 방송사, 언론사로서 누려온 명예와 특혜, 국민 성원 앞에 과연 그럴 만한 실체인지 한번 보여줘야 한다. 우리, 온실의 영화는 오래됐지만 언제 제대로 된 시험대에 올랐던 적 있는가. 차라리 잘됐다." 저자의 언론관, 짐작했는가. 정권 입맛대로 결정된 '방문진' 인사에 대해 MBC 내부자들에게 투쟁(?)을 독려하는 글이다.  (전문☞ MBC, 국민이 찌워준 살 보답할 차례)

또 많은 서평이 이 책에서 일제히 주목한 챕터는 프랑스의 한 주간지인 <묶인 오리>에 관한 것으로, '디오니소스적 기자와 아폴론적 기자'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오리는 뭐고 디오니소스, 아폴론은 또 왜 나와? 먼저 <묶인 오리>의 제호와 관련해서는 재밌고도 복잡한 설명이 따라 붙는다. 1915년에 창간됐고 회사 구성원이 100% 주주인 애초 '자유언론'이라는 의미에서 <자유인간>으로 시작했지만, 당시 극심한 검열에 반발하는 뜻으로 <묶인 인간>으로, 다시 확실한 이미지 각인을 위해 <묶인 오리>가 됐다고 한다. (이하 색깔 입힌 부분은 '미디어 오늘'에서 긁어왔음을 밝힌다)

<묶인 오리>에 저자가 주목하는 이유는 이 언론이 100년간 '무광고' 쇠고집을 부려왔음에도 현재도 30~40만 부를 찍어내고 있으며 매니아들의 절대 지지를 받고 있다는 현상의 기묘함(!) 때문이다. 8페이지 짜리 주간지가 광고 하나 안 싣고 100년 가까이 자존심을 지켜올 수 있다는 데에, 우리로서는 '상식적 이해'보다 '막연한 부러움'이 앞선다. 매주 수요일 <묶인 오리>가 발간되면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팔려나가는 걸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단다.

저자의 의도는 <묶인 오리>의 사례로 프랑스 언론 상황을 추켜세우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좌, 우 폭넓은 스펙트럼 속에서 다양한 정론지가 광고 없이도 존재할 수 있는 배경은 부럽지만, 전반적인 언론 상황은 마치 한국을 판 박아 놓은 듯하다. 프랑스에서 가장 큰 방송사인 TF1은 부이그라는 건설 그룹 소속, 라갸르데르란 미디어그룹은 비행기 제조회사가 대주주, 라팔 전투기 제조사 '다소'는 보수 일간지 <르피가로>를 소유하고 있다. 특히 TF1의 소유주 마르탱 부이그는 사르코지 대통령의 절친한 친구이기도 하다.

아무튼 이렇게 한국과 다르지 않은 언론 상황에서 <묶인 오리>가 선전할 수 있는 것은, 많은 부분 '내부적 요인'에서 기인한다. 한마디로 <묶인 오리>의 내용이나 편집이 엄청 좋다는 얘기다. 프랑스어를 한 자도 모르는 나는 영원히 알 수 없겠지만, 저자가 설명하는 바에 따르면 그렇다. 이 주간지는, '디오니소스적인 측면'과 '아폴론적인 측면' 모두를 충족시킨다.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술의 신 디오니소스와 태양의 신 아폴론을 가지고 언론의 양 날개를 설명하는 논리를 발견했다. 원래 이 두 신의 본의 아닌 '분업'은 예술을 완성시키는 데 필요하다고 이해되어왔다. 두 측면 중 어느 하나라도 부족하면 우리를 감동시킬 예술, 혹은 예술품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p 101)

디오니소스적인 기자라? 그가 술의 신임을 떠올린다면 어떤 것인지 감이 잡힐 것이다. 저자의 표현에 의하면 "일상을 통쾌하게 기록하는 것"이 바로 여기에 속한다.  <묶인 오리>는 본디 '풍자언론'의 정체성을 갖고 있는데 예컨대 저자가 3페이지나 할애해 소개하는 '카를라 브루니의 일기'처럼 유명인에 대한 <딴지일보>식의 비틀기가 그들 주특기라 할 수 있다. (카를라 부르니는 사르코지의 아내로, 전직 모델이었다는 그 엄청난 여자다) 이 지점이 바로 '넘치면서(過)' '불급(不及)'하는 무절제함, 디오니소스적 폭발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태양의 신답게 "하늘의 궁륭을 지나"듯이 '일관된 절도'를 지키는 것, "가려진 진실을 캐내서 꼿꼿한 글쓰기"를 하는 것이 바로 아폴론적 기자의 몫이다. <묶인 오리>가 풍자 말고 또 잘 하는 게 '탐사'라 하는데, 일찍이 미국식 탐사 보도를 도입해 '권력자와 돈'의 어두운 끈을 밝혀내는 보도로 엄청난 신뢰와 지지를 받고 있다는 설명이다. 2005년 당시 대통령이던 시라크가 일본 은행에 비밀 계좌를 갖고 있음을 최초로 보도한 게 바로 <묶인 오리>라 한다.

이 구분이 모든 매체에 일반화된다고 볼 순 없다. 대략 세 챕터 이상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아폴론적'인 것의 대비가 등장하니 이것이 원래 저자의 관심사인 게 분명한데, 이렇게 즐겨 쓰던 것을 <묶인 오리>를 설명하기 위해 빌려온 것에 불과할는지 모른다. 그런데 나는 이것이 언론사나 매체에 일반화될 순 없어도, 펜으로 밥벌이하는 이들 각각에겐 어느정도 일반적인 적용이 가능하다고 본다. 연성기사인가 강성기사인가, 흘러 넘치는 유려한 글인가 군더더기 없는 심플한 글인가, 고종석인가 김훈인가(?!)... 

거친 구분이 계속 허용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디오니소스적 글쓰기에 익숙해져있던 나는 언제부턴가 의도적으로 그것을 경계하고 폄하하고 버리려 했다. 전의 직장을 내 발로 걸어나와 이 곳으로 오면서 했던 생각도 일부는 그것이었다. 꼿꼿하고 정확한 아폴론적 글쓰기가 먼저(이자 마지막이)라 여긴 것이다. 1년 전 누군가 '발산적 창의력'과 '수렴적 창의력'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나도 여지껏 그 비교를 즐겨 쓰며 후자에 높은 점수를 준다. 아니, 적어도 나는 그렇게 되어야겠다고 느낀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니 결코 의도적으로 한 쪽에 높은 점수를 줄 필요는 없다고 느꼈다. 그녀도 기자이거늘 어법에서 자유롭고 문체도 제멋대로다. 이직하면서 첫째 들은 것도 "이런 감각, 문체 잊지 말라"는 주문이었다. "스트레이트를 주로 쓴다고 이거 다 해체할 필요는 없다"는 것. 결국 이 사이에서의 고민과 혼란이 좀 더 나은 글을 만든다. 

이게 또 그 자체로 '삶'이니 '일상'이 아니겠냐는 게 저자가 덧붙인 말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표지에서 '속살 들여다보겠다'며 내린 지퍼 양 옆에 그려진 '시계'와 '분수'도 꽤나 의미심장하다.

나는 파리의 풍경을 지켜보면서 두 신격의 공존이 대체로 세속적 삶 전반을 규정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됐다. 이를테면 아폴론적 국가와 디오니소스적 사회의 지속이다. 혹은 아폴론적 지배자와 디오니소스적 피지배자로 대립해봐도 되겠다. 그리고 어느 쌍이 됐든 양쪽이 만나는 지점의 성격에 관해 살펴봤더니, 그 지점은 끊임없는 밀고 당김이지 싶었다. 평안하고 타협된 상태가 일상이 아니라, 갈등과 역동성이 일상이 아닌가 하는 거다. (p300)




경향 11/23 스토리는 '적용'될 수 있을까? 1

스토리는 '적용'될 수 있을까?  (소설가 윤성희)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11221824495&code=990509
 

밀란 쿤데라는 “소설을 연극이나 영화로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그 소설의 구성을 해체해야 하기 때문”에, 소설들이 ‘드라마’ ‘연극’ ‘영화’로 살아남는 것은 공상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는 질문한다. “그렇게 하면 단순한 ‘스토리’만 남게 된다. 형식은 포기하고 말이다. 아니, 예술 작품에서 형식을 제하고 나면 무엇이 남는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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